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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學雜論

생각하는 힘, 노자의 인문학

[독후감]

상징과 문자 체계

 

"농업혁명 이후 수천 년에 이르는 인간의 역사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단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인류는 어떻게 자신들을 대규모 협력망으로 엮었는가? 그런 망을 지탱할 생물학적 본능이 결핍된 상태에서 말이다. 간단하게 답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상상의 질서를 창조하고 문자체계를 고안해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발명품을 통해서 생물학적으로 물려받은 것에 의해 생겨난 틈을 메웠다. 하지만 이런 협력망들의 출현은 많은 사람에게 의심스럽고 불안한 축복이었다. 그 그물을 지탱하는 상상의 질서는 중립적이지도 공정하지도 않았다. 그 망은 사람들을 서열로 구분된 가상의 집단으로 나눴다. 상류층이 특권과 권력을 향유하는 동안, 하류층은 차별과 압제로 고통을 받았다. 가령 함무라비 법전은 귀족, 평민, 노예 사이의 서열을 확립했다. 귀족은 좋은 것을 모두 가졌고, 평민은 그러고 남은 것을 가졌으며, 노예들은 불평을 하면 채찍질을 당했다.

1776년 미국인들이 수립한 가상의 질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선언했지만, 한편으로는 또 다른 위계질서를 확립했다

인간 종이 어떻게 대규모 협력을 하게되었는지 그 밑바탕은 ‘신화와 문자’에 있음을 ‘사피언스’에서  유발 하라리 말한다. 그는 대규모 협력을 통해 얻어진 자원의 분배에서  "모든 차별 — 자유민과 노예, 백인과 흑인,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차별은 허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단언한다.

노자의 인문학에서 최진석은 중국에서  그 신화 과정을 "불-기하학적 도형-혈연-상제-덕-도-법”으로 파악하고 있다. 불의 이용은 인간 종이 뇌의 크기를 키우는데 절대적인 공헌을 했다. 그 커진 뇌를 이용, 추상화(抽象化)로 상징 체계를 갖추고 변별력을 행사할 수 있게 했다.  내편 네편, 인간과 짐승, 인간과 신을 구분하게 했고 지배계급과 피 지배계급의 구분을 상징화 했다. 이어지는 역사의 진행과 문자의 상징성이 고도화 되고 지배 혈통과 피 지배혈통이 신에 의해 지명되는 시절을 거쳐, 신탁(神託)을 벗어난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덕(德)이 신을 움직였던 역사의 과정, 그리고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근거를 도(道)와 법(法)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

 

존재론과 관계론

 

공자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 본질인 ‘인(仁)’이 있다고 보고, 그 보편적 본질을 유지하고 확대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예(禮)’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추종할 것을 제안”한다. "<논어> 안연에서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설명하며 예에 맞지 않으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며, 말하지도 말며, 움직이지도 말라고 말했습니다. (…) 이 예는 전체사회가 모두 따라야하는 보편적 기준”으로 “공자가 건설하고자 했던 ‘인간의 길’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회는 변하고 사람의 다양한 행동 양식을 극기복례라는 잣대에 다 담지 못하거니와, 인간의 다양한 삶의 양태를 ‘예’로 한정지어 억압하고 차등화 하며 궁극에 가서는 이데올로기화 하여 사람의 개별자로서 주체성을 왜곡시킨다고 공자의 인본(仁本)에 근거를 둔 존재론의 한계를 노자는 지적한다.

즉 질서 유지를 위해 만들어 낸 ‘인'이라는 관념의 체계가 곧 사람을 "구분하고, 배제하며, 억압하는 권력으로 군림”하게 된다는 것이다.

노자는 말한다. 허울 좋은 인간의 상상 또는 주관성을 탈피해 자연이라는 ‘사실’의 세계에서 인간 질서의 근거를 발견하자고.그런 통찰을 기반으로 도덕경 제1장 첫구절을 시작한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가 말해질 수 있다면 진정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 개념화될 수 있다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이는 당시 춘추전국시대의 생활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농업혁명으로 인해 잉여의 부가 기존 계급적 규정을 흔들어 버리는 과정 속에 나타난다. 즉 군자가 군자이지 않는 현실, 소인이 소인이 아닌 상황에서 비롯한 것이다. 명(名)과 실(實)이 일치해야 하는데 괴리가 생긴 것이다.

결국  이름에 허울만 있는 경우가 태반이고 그 허울뿐인 이름으로 규정 짓고 그 규정으로 사회 질서(상상의 질서)를 도모 한다는 것은 헛다리 짚은거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사회질서를 사람 본성에서 찾을게 아니라 자연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도(人道)에서 찾을게 아니라 천도(天道, 자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노자에게 세상은 유무상생(有無相生), 유와 무가 서로 의존하며 서로 관계하고 있고 이것이 도(道)라고 억지로 이름 붙인다. (强字之曰道) 이 세계가 유와 무의 관계를 통해 존재한다는 시각이다.

"음악은 음표 안에 있지 않고 음표와 음표 사이에 존재하는 침묵 안에 있다”는 모짜르트의 말로 표현한다면, 음표는 유(有)요, 음표사이의 침묵은 무(無)인셈이다. 세상은 실재(實在)와 실재(實在) 사이에 일어나는 관계와 상호작용에서 존재하는 것이라 보면 제대로 이해하는 것일 게다. '내'가 나인 이유는 '네'와의 관계 속에 있고 무위, 즉 그 사이에 좋고, 나쁨(가치론적 판단)을 덜어 내는 노력을 통해서 상생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나로서 너를 바라보고, 너로서 나를 바라보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나를 속박하고 규정하는 가치의 틀 속에서 상대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 본다면 그게 바로 우물안 개구리이다.

 

새로운 양식의 정벌

 

우리는 지금 가치가 변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정의, 공정, 안전, 생태, 사회적 약자 배려, 양질의 일자리,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등 공공의 이익과 공동체 발전을 떠받드는 사회적 가치가 중요한 축으로 자리매김 하기 위해 조금씩 조금씩 미약하지만 진전되고 있다. 

또 자유와 평등을 조화시키기 위한 지난한 과정을 소화하고 있다. 특히 남북분단으로 초래된 이념적 속박을 풀려는 노력도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고 있다. 

한편으로는 세계적으로 4차 산업혁명의 기운으로 기존의 생산 양식이 바뀌고 경제적 지배 세력이 부침을 거듭고 당장 우리네 직장과 직업이 내용의 변화가 댕겨지고 있다. 

"인공지능, 3D프린팅, 자동차의 자율 주행기능, IoT, 바이오 테크놀로지 등이 4차 혁명으로 태어나게 주요 기술의 예다. 최근 발간된 도서 <제4차 산업혁명>은 4차 산업혁명으로의 이행을 ‘모든 것이연결되고 보다 지능적인 사회로의 진화’라고 요약한다. IoT와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사이버 세계와 물리적 세계가 네트워크로 연결돼 하나의 통합 시스템으로서 지능형 CPS(cyber-physical system)을구축할 것이란 예측이다.  상태에서 각각의 하드웨어들은 스마트폰처럼 데이터를 축적해 이를 필요에 따라 해석해가며 스스로 자동 갱신한다.  같은 과정을 통해서 제조업과 인간을 둘러싼 시스템운용방식은 대폭적인 변화를 맞을 것으로 예상된다. 책은 이를 통해 “자동차가 인간이 부르면 혼자달려오고, 냉장고와 정보를 주고 받는” 시대를 이야기 한다.

 혁명을 주도하는 국가들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독일의 인더스트리 4.0, 미국의 산업 인터넷, 일본의 로봇 신전략, 중국의 제조 2025 등이 꼽힌다. 한국 역시 최근 ICT 융합 기술에 대한 관심으로 보이며 4차 산업혁명으로서의 사회·문화적 이양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다.

4차 산업혁명이 편리한 미래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WEF는 지난 18일 ‘미래고용보고서’를 발표하며 4차 산업혁명을 통한 사회적 변화로 50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을 예고하기도 했다. 보고서는 제4차 산업혁명으로 자동화와 소비자와 생산자 직거래 등으로 오는 2020년까지 510만 개의 직업이 없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역사의 전환기에는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지배세력이 등장한다. 바로 새로운 양식의 정벌이다. 적절한 제어 장치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탐욕스런 자본주의는 돈놓고 돈먹기에 더욱 혈안이 될 것이고 우리가 꾸준히 진척시키고 있는 '바람직한' 가치를 또 다르게 왜곡시키는 현실을 마냥 바라만 봐야 할 수도 있다. 이미 우리는 구글과 애플에 종속되어 있다. 여러분 손에 모바일 없는 생활을 상상 해보라, 컴퓨터 없는 회사 업무가 가당키나 하나. 

코로나19에서 위력을 떨치던 위치기반 정보가 선량한 의도로만 사용되리란 보장은 없다.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어가고 있다. 국경과 민족이 의미가 없어지는 세상을 가상화폐는 추구하고 있고 이미 우리 깊숙이 들어와 앉아 있다.

코로나19는 비대면 세상을 가속화 시켜 디지털 거래를 심화시키고 중국과 미국의 패권 싸움은 4차산업혁명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쟁탈전에 불과하다.

 

경계에 서시라

 

경계란 무엇인가? 창문을 통해 바깥을 본다고 바깥을 제대로 보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창을 통해 집안 내부를 들여다 본다고 집안 내부 사정을 제대로 알 있는 것도 아니다. 문지방이 닳도록 왔다 갔다 교류해야 한다. 이쪽 저쪽 넘나들기가 바로 신념과 이념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상태이고 통찰력과 인문적 사고력이 생긴다.

노자의 인문학이 가지는 통찰력은 경계에 서란 것에 있다. 기존의 가치나 이념에 매몰되어 있으면 나를 벌써 떠나 버린 세상에서 나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 올 것이고, 나를 포습치 못한 미래의 가치만 쫒다 보면 뜬 구름 잡는 인생이 될  거란 거다. 

현재와 미래의 경계, 새 가치와 낡은 가치의 경계, 작은 것과 큰 것의 경계, 나와 너, 그리고 공동체와의 경계, 자연과 나와의 경계 그 ‘사이’에 나를 두어 전환기의 흐름을 읽어라는 경구로서의 '노자'를 작가 김진석이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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