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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것들

바다를 떠난 섬



1.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훨씬 짧은 시인이 바라보는 세상은 어떠할까? 시시때때로 마주하는 유한한 삶의 끝자락에서 시인이 갈구하며 지새운 시간을 되돌아보는 내면은 상대적으로 더 젊은이들의 그것과는 질이 달라도 한참 다를 것이다.  

대상에서 자신의 삶을 다시금 바라보는 힘의 근원은 갈망하며 살아온 시절과 그 절박했던 시간을 “자기 위로”로 되돌아볼 수 있는 평정심에서 시작된다. 마치 바람 없는 날 잔잔한 수면에 온전한 달이 반영되듯... 



… 

오래도록 머리를 괴이고

허기진 남루의 한 생을 열어보면

가슴 속 어느 구비에서는

하늘다리 아래 물빛처럼

시퍼런 상처가 떠오르기도 하지

서둘러 옷깃을 여미지만

부끄러워라 욕망의 허물들이 칙칙하게 겨울비에 젖어가는

저문 십이월

비 내리는 양덕기미 해변을 서성이는 날

 

… 


막막하여라

목숨 또한 쉬 저물리라

어김없이 제 품을 열어 한 생을 거두는 

죽음 같은 어둠

추위에 웅크리고 나앉은 떼물새의 소슬한 죽지 위에도

파도소리처럼 나직이 숨죽여 우는 관호마을

바다의 결 같은 고샅길 구비 위에도

속절없이 어둠은 내리리라 쌓이리라


십이월 긴 밤

멀고 긴 꿈을 접고

홀로이 관매도에 들어

아, 내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이승의 어느 구비마다

그리워서 행복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던가

사람아, 내 사람아 

-'겨울 관매도’ 중에서-


"목숨 또한 쉬 저물" 것임을 잘 아는 시인은 살아온 지난날들을 하나씩 되짚어 보며 "가슴 속 어느 구비"에 있는 어리석고 부끄러운 기억들도 들추어 내기도 하고, "멀고 긴 꿈을 접을" 때가 됐음도 안다. 

유한한 삶의 끝자락을 내내 보고 있는 시인의 시는 참 슬프다. 아니, 평정심이 없다면 참 슬플 것이다. “ 아 하루살이, 자신을 우습게 보며 즐길 내일마저 우습게 보는!”(‘하루살이’, 황동규)류의 평정심이 있기에 "그리워서 행복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던가” 하고 “자기 위로”를 말할 수 있는 게 아닐까?




2.

거차도, 병풍도, 동거차, 맹골죽도, 팽목항… 그렇다. 육지에 사는 사람이라면 죽을 때까지 모르고 살았을 섬의 이름들, 세월호 참사가 아니라면 그리 알려지지도 않았을 진도 앞바다의 섬들이다. 

천병태 시인은 태어나서 학창시절 일부를 빼고나면 평생을 진도에서 살아온 그야말로 진도 토박이이다. '바다를 떠난 섬’을 구성하는 1부의 제목들이 전부 진도 주변의 섬이름으로 이루어져 있음에서 보듯 섬과 바다는 그의 삶이자 시와 그를 이어주는 다리이다. 


여미 뒷개

관사도 섬봉우리가 벗어놓고 떠난 노을


아, 눈이 부셔 하늘의 맨살이 열리네

빈 선창에는 불맞은 파도소리가 숨어들고


폐분교의 삭은 교문에 머리를 기대고 서면 

병든 수캐처럼 끌고 온 기억의 종점

… 

-‘여미마을’ 중에서-



천병태 시인에게 있어서 섬과 바다는 내면을 시어로 형상화하는 단순한 매개체를 넘어 시의 원형으로 자리하고 있다. “생각하니/내가 헤매던 곳은 언제나/땅끝이었다”(‘카보 다 호카’ 중에서)라며 “자기 위로”의 과정을 밟고 있는 시인, 섬들의 굽이굽이와 바다의 속살까지 꿰차고 있는 시인에게 진도 앞바다 세월호 참사가 시에 녹아나는 일은 당연하다. 물론 세월호 참사를 직접 언급한 시는 시집을 통틀어 ‘저문 팽목항’과‘어부 야보고’ 두 편이다. 그러나 그의 시 군데군데 스며있는, 지금도 진행형인 그날의 참사를 내면화시킨 시인의 시어를 따라 걸어보는 것도 이 시집이 갖는 의미일 것이다.


천병태 시인은 전남 진도에서 태어나 월간 '시조문학'과 '문학예술' 신인상을 통해 문단에 나와서 전남문학상과 편운문학상, 전라남도문화상을 수상했다.

'나배도 소식’을 시작으로 '바다를 떠난 섬’까지 시집 6권을 낸 그는 전남시인협회장, 펜클럽, 한국시조시인협회이사, 문학예술동인회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진도예총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